힘들었던 재수 생활이 끝나고 나는
혼자 차이나타운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많은 사람, 많은
먹거리 그리고 빨간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이곳은 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나는 대학교,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외국어고등학교 중국어과 학생이었고 어떤 동아리에 들어갈지 생각하다가 자기소개서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더해줄
중국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다. 나는 그 동아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은 채 홍보 포스터에 쓰인 ‘중국’ 이 단어만 보고 동아리 회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물론 지금 생각해도 이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생각이 많은
나에게 최고의 선택이었을 테니까. 중국어과 학생만 뽑는 그 동아리는 경쟁률이 세지 않았고 나는 당연히
합격 문자를 받았다. 동아리 시간이 되어 같은 동아리에 지원한 친구들과 같이 동아리방에 가서 회장의
말을 듣는데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나갈 뻔했다. 이 동아리는 기사를 쓰는 동아리였다. 나는 평소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내 글을 우리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보게 될 줄도 몰랐다. 이에 나는 어깨에 무거운 돌을 얹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자와
사진사 이 두 가지로 역할이 나누어졌는데 나는 기왕 기사 쓰는 동아리에 들어왔으니 글 쓰는 방법이라도 배워가야겠다라는 마음으로 기자 역할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첫 임무가 중국 관련 기사를 쓰는 것이었는데 나는 같은 팀이 된 친구들과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기로 했다. 차이나타운에 가기로 한 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하였다. 친구들과 중국 음식과 관련해서 기사를 쓰기로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음식을 경험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고
서둘러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오르막길인 거리가 힘들어서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졌다. 첫 번째 음식은 닭날개 만두와 버블티였다. 버블티는
평소에 먹던 버블티와는 다른 맛이 났고 닭날개 만두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내가 대만에 갔을
때를 떠올려야 말할 수 있었다. “주영아
우리 넷이 같이 대만에 가는 거 어때?” 우리 학교에는 자매 학교 프로그램이
있어 일 년에 한 번씩 대만에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았다. 물론 돈을 내야 했기에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나는 한 번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한 친구의 제안에 나머지 두 명이 박수를
치며 동의하는 바람에 나는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생각해볼게’라고
작게 대답한 후 빠르게 이야기를 전환하려고 노력하였다. “엄마
학교에서 대만으로 여행을 가는데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하는데…..” “얼만데?” “음….백만원” “보내줄게. 갔다 와” 엄청나게 고민해서 엄마께 말씀드렸는데
생각보다 빠르고 긍정적인 대답에 오히려 당황을 해버렸다. 다시 한 번 똑같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나는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갈 수 있다고 소리쳤고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나에게
계획을 보여주었다. 계획에는 먹어야 하는 음식, 구매해야
하는 물건 등이 적혀있었다. 학교에서 교육을 듣고 대만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친구들과 만났다. 비행기를 탔을 때 가슴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서 좋아서 그런 것인지 비행기가
하늘에 오르면서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스펀에 도착한 우리는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 나오는 것처럼 멋이 나게
풍등을 날리고 그 바로 옆에 있는 닭날개 볶음밥을 먹었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버블티를
사 먹었다. 버블티의 원조국가인 대만에서 버블티를 먹어보니 ‘역시
원조인 이유가 있구나’하고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버블티에서도 이런 감탄사가 나올만한 맛이 났다. 닭날개 만두도 맛이 있었지만 대만에서 먹어본 닭날개
볶음밥과는 다른 것이어서 이상하다고 느꼈졌다. 두 번째 음식은 대왕 카스테라였다. 이 빵은 내가 여태 먹어본 빵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형체가 녹아 없어졌고 달콤함만을 남긴 채 목으로 넘어갔다. 이것은 단수이에 갔을 때 대만에 여러
번 가본 적 있는 친구가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강하게 추천했던 것이었다. 마지막 음식은 펑리수였다. 대만에서 먹은 거와 같은 파인애플 맛 펑리수였다. 대만에서의 여행이
거의 끝나갈 때쯤에 중국어과 선생님들이 선물로 사 가기 좋은 음식이라고 추천하셨고 나는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줄 생각에 뿌듯함과 기쁨을 느끼면서
펑리수 두 상자를 샀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펑리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엄마께서는 한 상자를 큰엄마께 선물하자고 말씀하셨고 나는 엄마에게 섭섭함을 느꼈지만 그러기로 하였다. 나중에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를 알게 되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왔다. “형님
주영이 대만 여행 갈 돈 빌려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최대한 빨리 갚을게요” “그래. 주영이한테 펑리수 잘 먹겠다고 말 전해주고” 엄마는 큰엄마께 돈을 빌려 여행비를
마련한 것이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기쁨만 가득한 채 여행을 갔다 왔다. 엄마는 예전부터 같은 식구인데
한 식구는 잘살고 한 식구는 힘들게 사는 것에 대해 눈물을 많이 흘리셨고 큰엄마께 돈을 빌릴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돈이 없으면 자존심도
없는 것이라며 속상해하셨다. 이런 모습을 보고자란 내가 엄마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해왔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고 속상했다. 이러한 사실을 숨긴 엄마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이러한 감정보다 엄마의 사랑이 더 크게 느껴져서 가슴속에 난로를 켠 듯 마음이 따뜻해져 갔다. 차이나타운에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때의 생각이 났다. 나는 수능이
끝나고 내 인생이 망한 것 같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비웃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차가워져 갔다. 이
시점에 나는 그때의 감정을 느끼고자 차이나타운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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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인천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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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던 재수 생활이 끝나고 나는 혼자 차이나타운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많은 사람, 많은 먹거리 그리고 빨간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이곳은 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나는 대학교,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외국어고등학교 중국어과 학생이었고 어떤 동아리에 들어갈지 생각하다가 자기소개서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더해줄 중국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다. 나는 그 동아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은 채 홍보 포스터에 쓰인 ‘중국’ 이 단어만 보고 동아리 회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물론 지금 생각해도 이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생각이 많은 나에게 최고의 선택이었을 테니까. 중국어과 학생만 뽑는 그 동아리는 경쟁률이 세지 않았고 나는 당연히 합격 문자를 받았다. 동아리 시간이 되어 같은 동아리에 지원한 친구들과 같이 동아리방에 가서 회장의 말을 듣는데 깜짝 놀라 문을 열고 나갈 뻔했다. 이 동아리는 기사를 쓰는 동아리였다. 나는 평소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내 글을 우리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보게 될 줄도 몰랐다. 이에 나는 어깨에 무거운 돌을 얹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자와 사진사 이 두 가지로 역할이 나누어졌는데 나는 기왕 기사 쓰는 동아리에 들어왔으니 글 쓰는 방법이라도 배워가야겠다라는 마음으로 기자 역할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첫 임무가 중국 관련 기사를 쓰는 것이었는데 나는 같은 팀이 된 친구들과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기로 했다. 차이나타운에 가기로 한 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하였다. 친구들과 중국 음식과 관련해서 기사를 쓰기로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음식을 경험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고 서둘러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오르막길인 거리가 힘들어서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졌다. 첫 번째 음식은 닭날개 만두와 버블티였다. 버블티는 평소에 먹던 버블티와는 다른 맛이 났고 닭날개 만두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내가 대만에 갔을 때를 떠올려야 말할 수 있었다.
“주영아 우리 넷이 같이 대만에 가는 거 어때?”
우리 학교에는 자매 학교 프로그램이 있어 일 년에 한 번씩 대만에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았다. 물론 돈을 내야 했기에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나는 한 번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한 친구의 제안에 나머지 두 명이 박수를 치며 동의하는 바람에 나는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생각해볼게’라고 작게 대답한 후 빠르게 이야기를 전환하려고 노력하였다.
“엄마 학교에서 대만으로 여행을 가는데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하는데…..”
“얼만데?”
“음….백만원”
“보내줄게. 갔다 와”
엄청나게 고민해서 엄마께 말씀드렸는데 생각보다 빠르고 긍정적인 대답에 오히려 당황을 해버렸다. 다시 한 번 똑같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나는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갈 수 있다고 소리쳤고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나에게 계획을 보여주었다. 계획에는 먹어야 하는 음식, 구매해야 하는 물건 등이 적혀있었다. 학교에서 교육을 듣고 대만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친구들과 만났다. 비행기를 탔을 때 가슴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서 좋아서 그런 것인지 비행기가 하늘에 오르면서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스펀에 도착한 우리는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 나오는 것처럼 멋이 나게 풍등을 날리고 그 바로 옆에 있는 닭날개 볶음밥을 먹었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버블티를 사 먹었다. 버블티의 원조국가인 대만에서 버블티를 먹어보니 ‘역시 원조인 이유가 있구나’하고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버블티에서도 이런 감탄사가 나올만한 맛이 났다. 닭날개 만두도 맛이 있었지만 대만에서 먹어본 닭날개 볶음밥과는 다른 것이어서 이상하다고 느꼈졌다. 두 번째 음식은 대왕 카스테라였다. 이 빵은 내가 여태 먹어본 빵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형체가 녹아 없어졌고 달콤함만을 남긴 채 목으로 넘어갔다. 이것은 단수이에 갔을 때 대만에 여러 번 가본 적 있는 친구가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강하게 추천했던 것이었다. 마지막 음식은 펑리수였다. 대만에서 먹은 거와 같은 파인애플 맛 펑리수였다. 대만에서의 여행이 거의 끝나갈 때쯤에 중국어과 선생님들이 선물로 사 가기 좋은 음식이라고 추천하셨고 나는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줄 생각에 뿌듯함과 기쁨을 느끼면서 펑리수 두 상자를 샀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펑리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엄마께서는 한 상자를 큰엄마께 선물하자고 말씀하셨고 나는 엄마에게 섭섭함을 느꼈지만 그러기로 하였다. 나중에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를 알게 되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왔다.
“형님 주영이 대만 여행 갈 돈 빌려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최대한 빨리 갚을게요”
“그래. 주영이한테 펑리수 잘 먹겠다고 말 전해주고”
엄마는 큰엄마께 돈을 빌려 여행비를 마련한 것이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기쁨만 가득한 채 여행을 갔다 왔다. 엄마는 예전부터 같은 식구인데 한 식구는 잘살고 한 식구는 힘들게 사는 것에 대해 눈물을 많이 흘리셨고 큰엄마께 돈을 빌릴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돈이 없으면 자존심도 없는 것이라며 속상해하셨다. 이런 모습을 보고자란 내가 엄마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해왔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고 속상했다. 이러한 사실을 숨긴 엄마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이러한 감정보다 엄마의 사랑이 더 크게 느껴져서 가슴속에 난로를 켠 듯 마음이 따뜻해져 갔다. 차이나타운에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때의 생각이 났다. 나는 수능이 끝나고 내 인생이 망한 것 같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비웃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차가워져 갔다. 이 시점에 나는 그때의 감정을 느끼고자 차이나타운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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