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거지와 장사

김성준
2020-10-19
조회수 1525

2019 인천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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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에 어느 굴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굴을 장사굴이라 불렀다. 그 굴은 입구가 낮아서 어린아이라 해도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일단 들어갔다 하면 예닐곱 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있었다.

장사굴이 왜 장사굴로 불렸는가 하니, 이 굴에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가 살았기 때문이다. 힘이 어찌나 셌던지 다 큰 소나무를 뽑아 목침으로 삼을 정도였고, 두 발을 한 번 구르면 지축이 흔들려 염불 하던 스님들도 겁에 질린 채 독경 소리를 뚝 그칠 정도였다. 그냥 걷기만 해도 바위에 커다란 발자국이 찍혔는데, 거기 고인 빗물이면 열 식구가 한여름 동안 쓰고도 남았다 한다. 덩치는 또 얼마나 무지막지했던지, 산중의 곰을 강아지처럼 내려다보며 쓰다듬고, 멧돼지를 물어가던 범을 냉큼 잡아 고양이처럼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한다.

장사의 이름은 딱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누구 하나 감히 장사에게 가서 “이보쇼, 댁의 이름이 어찌 되시오?”라고 물어볼 엄두를 못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장사로 불렸던 것이고, 장사라고만 불러도 인천 사람 누구 하나 모르는 자가 없었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무엇이나 덮어놓고 섬기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사는 그저 힘세고 덩치가 클 뿐이었는데, 마치 산신령이라도 된다는 듯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섬기며 제물을 갖다 바쳤던 것이다. 먹을 게 떨어지면 장사가 마을로 내려와 소든 돼지든 몽땅 잡아먹을 게 뻔하니 백성들로서는 고육지책이었다.

장사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굴에 틀어박혀 낮잠을 쿨쿨 자고 일어나면 떡이며 술이며 밥이며 고기가 자기 덩치만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장사는 대체 자기가 자는 동안 왜 이런 요술이 부려지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주린 배를 채우는 즉시 다시 잠에 곯아떨어졌으니 더 이상 생각이고 뭐고 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장사는 생각이란 걸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워낙 큰 덩치 여기저기에 원기가 흩어지다 보니 머리가 서너 살 정도밖에 안 됐던 것이다. 그 때문에라도 사람들은 장사를 더더욱 두려워했다. 둔한 머리 탓에 무슨 오해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나무꾼이 계양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는데 장사가 노기를 띠며 고함을 쳐댔다.

“야, 이 산적놈아! 계양산 나무에게 도끼질을 하며 강도짓을 하느냐! 그 도토리 빼앗아서 네놈이 잘살면 얼마나 잘살 줄 아느냐!”

장사는 나무꾼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위협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 쩌렁쩌렁 울리던 고함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구름마저 멀리 흩어질 정도였다.

겁에 질린 나무꾼은 벌벌 떨며 넙죽 엎드렸다.

“장사님, 혹시 저에게 하신 말씀이신지요?”

“그렇다, 이 산적놈아!”

“소인은 가난한 나무꾼인데 어찌 산적이라 하시는 겁니까요?”

나무꾼이 재차 묻자 장사는 보통 남정네 팔뚝만 한 손가락으로 소여물통 같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멍하게 나무꾼을 바라봤다.

“내가 언제 네놈에게 산적이라 했더냐?”

“방금 소인에게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이놈이 생사람 잡는구나. 나무꾼 주제에 산적이라니, 그 어느 바보가 그 말을 믿겠느냐.”

나무꾼은 어이가 없었다. 장사의 아둔함은 대충 이 정도였다.

임금 앞에서도 오줌을 갈길 정도로 위세가 당당한 장사였지만 딱 한 명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 한 열 살쯤 먹었을까. 계양산 기슭에 사는 거지 꼬마가 바로 장사의 주인이다. 거지 꼬마가 장사의 어깨에 앉아서 소처럼 부리고, 말처럼 올라타면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을 잃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이유를 아는 자가 없었다. 훗날 거지 꼬마가 늙어죽을 때쯤 일의 전모를 아들에게 밝혔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어느 쌀쌀한 봄날, 계양산 기슭에 살던 거지 꼬마가 장사굴에 잠입한 적이 있다. 꼬마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삼순구식으로 단련이 돼 있는 몸이라 해도 보릿고개에 닷새를 굶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도 굶어댔더니 이 녀석이 눈에 보이는 게 없던지 그만 장사굴에 들어가 장사가 자는 동안 허겁지겁 제물을 먹어버린 것이다. 밥도 먹고, 국도 후루룩 마시고, 떡도 씹고, 고기도 삼키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주린 창자에 음식이 한가득 들어가자 녀석은 그만 졸음이 밀려와 그대로 뻗어 잠들어버렸다.

꼬마가 깨어났을 때 땅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무슨 까닭일까 싶어 어리둥절한 거지. 급기야 몸까지 대롱대롱 흔들린다.

“네 이놈, 네놈이 내 음식을 다 먹어치운 게냐?”

장사가 노기 띤 음성으로 꼬마를 거꾸로 잡은 채 노려봤다. 거지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그런데 이 녀석이 정말 죽으려고 작정은 한 것인지, 적반하장으로 장사에게 일갈을 해대는 게 아닌가.

“그래, 내가 먹었다, 이놈아!”

장사는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한입거리도 안 되는 걸 잡아먹어봐야 입맛만 버리는 꼴이지만 아쉬운 대로 이놈이라도 먹을까 생각했다.

“오냐, 그럼 내가 제물 대신 네놈을 먹어주마. 어차피 내 음식이 네놈 배 속에 있을 테니 네놈을 먹는 게 곧 제물을 먹는 걸일 테지.”

장사는 정말 거지 꼬마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꼬마가 가소롭다는 듯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장사는 입을 하 벌리다 말고 멍한 눈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이놈아, 거지 팔자를 이제 접을 생각을 하니 그렇게 기쁘더냐? 죽는 마당에 웃는 놈은 네놈이 처음이구나.”

하지만 꼬마는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땅땅 쳤다.

“내가 오백 년을 살았지만 한갓 장사 따위가 산신령을 먹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구나. 이 곰처럼 미련한 덩치 녀석아!”

오백 년을 살아? 이 꼬마가? 그리고 산신령이라고? 이 꼬마가 계양산 산신령이라고? 가뜩이나 머리가 둔한 장사라서 거지 꼬마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놈이 어떻게 오백 년을 살았다는 게냐? 그리고 네놈이 어째서 계양산 신령님이라는 거냐?”

꼬마는 거꾸로 매달린 채 말했다.

“신령은 본디 구름 뒤에 몸을 숨겼다가 비가 올 때 그 빗방울을 타고 잠시 산에 내려온다. 나는 간밤에 내린 보슬비를 타고 계양산에 왔는데, 그 이유는 네놈을 벌주기 위함이다.”

“뭐? 나를 벌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네놈은 산신령 행세를 하며 사람들에게 제물을 받아먹지 않았더냐. 네놈 때문에 인천 백성의 곳간에 쌀 한 톨 남아날 일이 없다. 게다가 그 음식들은 원래 내 것이니 마땅히 내가 먹어야 할 것이다. 장사 네놈이 신령 행세를 하며 내 제물을 훔쳐 먹은 셈이니 너를 장차 내 종으로 삼으려 한다.”

자신을 종으로 삼으려 한다는 꼬마의 말에 장사는 떼구루루 구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바람에 굴이 흔들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장사의 손에서 벗어난 꼬마는 위엄을 잃지 않고 떡하니 버티고 섰다. 비루먹고 더러운 거지 꼬마가 짐짓 위세를 떨며 양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서 있자 장사는 그 꼴이 우스워 또 떼굴떼굴 굴렀다. 그 구르는 힘이 마치 산사태에 바위 구르는 것 같았다. 한참을 정신없이 웃던 장사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꼬마에게 말했다.

“네놈 덕분에 십 년 만에 실컷 웃는구나. 수컷 범이 고양이처럼 고분고분 내 가랑이 사이로 길 때 웃어보고 처음 웃어보는구나. 그래, 좋다. 네놈이 산신령님이라면 내 기꺼이 네놈의 종이 되마. 그러나 그게 사실이 아니면 네놈은 오늘 산짐승 밥이 될 줄 알아라. 그런데 네놈이 산신령님이란 걸 어떻게 확인하지?”

장사는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그 큰 손가락으로 긁적이면서 난감해 했다.

“내가 산신령이란 건 계양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사람들은 너를 두려워하니 감히 네놈에게 거짓말을 할 리도 없는 법, 나와 함께 마을로 가서 확인해보자꾸나.”

그렇게 해서 둘은 굴을 빠져나와 마을로 향했다. 꼬마는 마을사람들이 자신을 잘 볼 수 있도록 목말을 태워달라고 했다. 장사는 투덜거리면서도 꼬마를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꼬마는 사람의 어깨가 아니라 임금님이나 타는 커다란 가마에 타는 기분이었다.

장사 어깨에 올라탄 꼬마는 이리저리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저리 가서 물어보자, 요리 가서 물어보자, 여기서 잠깐 멈추자……. 그럴 때마다 장사는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 녀석의 거짓말이 밝혀지는 순간 백 리 밖으로 던져버릴 참이었으니 잠깐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런데 둘이 하는 꼴을 보자 마을사람들은 기겁을 했다. 땟국 뚝뚝 흐르는 거지 꼬마가 장사를 말처럼 부리며 이리저리 타고 다니다니. 장사가 마을에 나타난 것만 해도 놀라 자빠질 정도였는데, 꼬마에게 조종당하는 것까지 보자 마을사람들은 급히 몸을 숨기고 눈만 빠끔히 내친 채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봤다. 도저히 산신령이 아니고서는 장사를 어린아이 대하듯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왜 죄다 도망을 치는 거지?”

장사는 까닭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바람에 목말을 타고 있던 거지 꼬마는 갈비뼈가 으스러질 뻔했다. 하지만 아픔을 참으며 꼬마가 말했다.

“내가 산신령이니까 그렇지.”

“네놈이 산신령인지 사기꾼인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 터.”

장사는 우레 같은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모았다. 장사 하나도 버거운데 산신령이라니, 겁에 질린 사람들은 두려움에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장사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로 슬그머니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장사가 물었다.

“이놈들아, 내 어깨 위에 올라탄 이 녀석이 산신령이 맞느냐?”

그걸 사람들이 어찌 안단 말인가. 그 누구도 산신령을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장사를 저렇게 꼼짝 못하게 하는 걸로 봐서는 산신령일지도 모른다고 다들 생각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촌장이 말했다.

“장사 나리, 소인들은 산신령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요. 하지만 장사 나리 어깨 위에 올라탄 저분이 산신령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요.”

“뭐가 말이 그렇게 복잡해!”

촌장의 말은 장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듯싶다. 장사가 버럭 역정을 내자, 꼬마가 장사의 머리를 토닥토닥 때려 진정시키며 말했다.

“촌장아, 내가 산신령이 아니라면 네놈이 부엌 찬장에 꿀단지 두 개를 숨겨둔 걸 어찌 알겠느냐.”

“예? 그걸 어찌 아십니까요? 그건 제 아들놈도 모르는 보물인뎁쇼.”

촌장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꼬마는 촌장을 제쳐두고 그 옆에 서 있는 아낙에게 말했다.

“자네 집 창고에는 호미가 세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녹이 슬었고, 또 하나는 자루가 썩었구먼.”

“에구머니나! 대체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꼬마는 이번에는 자기 또래의 사내녀석에게 말했다.

“이놈아, 네놈은 글공부하라고 아비가 구해다준 천자문을 내다 팔아 엿으로 바꿔 먹었구나.”

그러자 사내녀석의 아비가 가슴이 철렁했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맞다고, 저 어린 양반 말씀이 옳다고 맞장구를 쳐댔다.

거지꼬마는 줄줄이 몇 명을 더 지목하더니 그 집안의 작은 비밀들을 까발렸다. 그러자 촌장과 마을사람들이 일제히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아이고, 산신령님이 우리 마을에 행사하셨네. 구름에서 내려와 장사를 타고 오셨다네!”

마을은 탄성으로 가득 찼다. 거지꼬마는 빙그레 웃으며 장사를 내려다봤다.

“보아라, 사람들이 나를 보며 산신령이라고 절을 하지 않느냐. 이래도 내가 산신령이 아니냐?”

일이 이렇게 되자 장사로서도 더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긴 자신의 굴에 들어와 제물을 먹은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 꼬마가 정말 산신령이라니! 장사는 꼬마를 내려놓고 넙죽 엎드렸다. 제 아무리 용력이 산을 뽑을 정도라 하지만 산신령 앞에서는 범 앞의 토끼마냥 벌벌 떨 수밖에.

“신령님, 소인이 아둔하여 신령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 하나 궁금한 것이 있긴 한데…….”

“무엇이냐?”

“산신령은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무슨 지팡이 같은 걸 들고 다니지 않습니까요? 한데 신령님께서는 어린아이로 둔갑을 하시니 소인이 오해하는 것도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요.”

거지꼬마는 장사에게 꿀밤을 한 대 쥐어박고는 말했다.

“이놈아, 나이 먹었다고 수염 난 영감이 되면 그게 범인이지 도를 닦은 신령이겠느냐. 구름 위 저편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법, 신령은 노인으로 태어나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가 되는 법이니라.”

“어이쿠, 아둔한 소인이 그 이치를 어찌 알겠나이까!”

그리하여 장사는 약속대로 그날부터 거지꼬마의 종이 되었다. 꼬마는 장사를 소처럼 부리며 밭을 갈았고, 목동으로 삼아 가축을 지키게 했다. 마을사람 중 누군가 급한 일이 생기면 장사가 목말을 태워 냉큼 달렸는데, 장사의 한 걸음은 보통 남자의 열 걸음에 맞먹는 것이었으니 축지법이 따로 없었다. 관아에서 성을 쌓으라고 명이 떨어지면 장사 혼자서 뚝딱 해치워버렸는데, 그 덕에 마을사람들은 천하태평을 즐기며 쾌재를 불렀다. 어디 그뿐이랴. 계양산에 어마어마한 장사가 있다는 소문 탓에 산적도 얼씬 못하고, 도둑도 마을 어귀에서 발을 돌려야 했으니 계양산 기슭에는 연일 노랫소리만 퍼졌다.

거지꼬마는 장사를 종으로 부리며 온갖 선행을 쌓았다. 선행을 쌓을수록 칭송하는 소리도 드높아졌다. 거지꼬마는 더 이상 땟국 흐르는 거지로 살 필요가 없어 좋았고, 계양산 인근 백성들은 더는 장사에게 엄청난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어 싱글싱글 웃었다.

아무리 세상에 둘도 없는 장사라지만 세월의 무게는 이길 수 없는 법, 마침내 장사는 늙어 죽었다. 거지꼬마도 늙어 자식들 앞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됐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는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뭘 말이냐?”

노인이 된 거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마을사람들을 속이신 겁니까? 왜 다들 아버지를 산신령이라고 믿었던 겁니까?”

노인은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 남은 몇 마디로 유언을 남길까 싶었지만, 차라리 이 말이 가장 나은 유언이다 싶어 힘을 짜냈다.

“그때 장사의 음식을 훔쳐 먹다가 들켰을 때, 나는 벼랑에 매달린 형국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을힘을 다해야 했는데, 사람이 궁지에 몰리다 보면 전에 없는 지혜가 솟아나더구나. 내가 장사에게 목말을 타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일단 나를 범상치 않게 보았지. 거기다가 밥 훔쳐 먹으려고 이집 저집 드나들 때 봐두었던 그 집만의 비밀을 내가 하나씩 꺼내들자 사람들은 기겁할 수밖에. 촌장네 집의 꿀단지 위치를 봐두어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찍어 먹어보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말을 듣자 그때서야 자식들은 무릎을 탁 쳤다. 노인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위기(危機)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뜻하느니라. 내가 장사 손에 낚아채졌던 위험한 상황을 넘기자 거지꼴을 면하는 기회를 얻지 않았느냐.”

그러고는 노인은 눈을 감았다.

과연 노인의 말대로 노인은 인생의 가장 궁벽한 때 맞았던 위기를 오히려 탈출의 기회로 삼았다. 장사 역시 힘만 믿고 무위도식하던 나쁜 습벽을 버리고 칭송받는 일꾼으로 거듭났으니, 장사굴에서의 그 아슬아슬한 만남은 둘의 인생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던 셈이다.



■ 작품설명 (개인의 경험을 가미한 설명을 부탁드려요0


인천 간석동에 살던 시절, 취미가 등산이라서 인천 일대의 산을 자주 올랐습니다. 그 중 계양산의 아름다움과 풍경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계양산에 얽힌 설화에 주목하였습니다. 계양산에 있다는 ‘장사굴’에는 세 개의 일화가 있습니다(계양구청 홈페이지 참조). 그 중 ‘장사’에 관한 일화에 살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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