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모작(2019) 인천 근대문명의 시작과 명암-인천역부터 제물포구락부까지의 여행

노광래
2020-10-20
조회수 457

2019 인천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출품


■ 컨텐츠 등록

유튜브 영상 URL 등록, 또는 파일, 그림, 에세이 등을 등록을 원하시는 분들은 하단에 입력바랍니다

인천 근대문명의 시작과 명암-인천역부터 제물포구락부까지의 여행

인천, 대한민국의 수도 서쪽에 위치하며 항구가 있고 일본 및 중국과의 해상진입이 수월한 도시.
외국의 근대문명과의 접촉 및 유입이 가장 빠르게 된 도시.
올해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아들에게 일본의 침략하에 우리나라에 벌어진 일들을
가르치려 했으며 그러면서 나 역시 일본의 만행이나 잘못된 사항 중 모르는 것 역시 새롭게 깨닫기도 했다.
금번 인천관광 스토리텔링에 대해서 조사하던 중,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기 있는 관광지가 사실은
일제의 침략과 우리나라에 대한 침탈 야욕과 관련된 사실이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사실은 우리나라의 근대문명의 시작이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과 상당한 연관이 있으며,
그러한 것이 인천의 주요 관광명소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지금부터 근대문명의 유입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인 장소이며 현재로는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장소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인천역
서울지하철 1호선 인천행 마지막역인 인천역은 1899년 개통하였고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긴 철도이다.
서울 인천 간 사람과 물자의 빠른 이동의 필요성의 이유로 일본이 건설한 사업의 결과물로서,
일본이 조선을 노리고 침탈을 시작할 당시 목적과 맞물려 조선 내의 자원을 일본으로 보내려고 인천항으로
옮기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작되었다.


인천항
인천역 바로 옆의 인천항의 발달은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년 일본군함이 강화도에 불법침입후 포격책임을
조선에 전가 및 일본에 개항하도록 압박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사건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적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면 조선에서의 본격적인 외국문물 유입의 계기가 된 것이며
근대국가로서의 발전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항장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강제개항되고 1883년 인천항 인근에 개항장이 설치된다.
개항장은 이곳을 통해 서양문물이 들어온다는 당시의 긍정적인 홍보 이면에는 조선의 쌀과 울자들을
일본으로 실어내보내려는 약탈의 수단장소이기도 했다.
이후 1899년 철도가 인천항까지 연결된 것도 이 수탈의 이유가 상당히 내포되어 있다.

지금은 근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채로 카페나 다른 현대적인 예술장소로 변모되었지만, 100여년전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인천역에서 약 8분 정도 걸어가면 인천아트플랫폼이 있다. 그 옆에 한국근대문학관이 있고, 개항장 거리에는 일본 제1은행 등 일제시대의 은행 3개의 건물은 그 외관형태는 아직 남아있다.
은행은 은행업무외에 조선인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의 건물이었다.


조계지
차이나타운을 시작하는 관문을 걷다보면, 중국식 건물과 일본식 건물이 계단을 사이에 두고 나뉜 구역이 있다.
바로 청일 조계지이다. 계단의 오른쪽은 일본 스타일, 왼쪽은 중군 청나라스타일의 양식이라 한다.
개항 후 인천에 온 외국인들이 자국민들끼리 모여 동네를 형성하고 살았는데, 이 구역들은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설정되었다.
1984년 이후로 일본 청나라와 맺은 협약으로 각국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인천 제물포에 거류할 수 있었고
치외법권적 특수 권익 지구로 된 것이다. 계단의 왼쪽은 청나라풍의 건물을 시작으로 차이나타운으로 연결되어 있다.
계단의 오른쪽은 일본전통가옥으로 시작하여 은행, 상점 등의건물이 개항장거리까지 이어진다.
반면 응봉산을 끼고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등 각 나라의 조계지가 있다.
당시 열대강국이 조선에서의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서 주거를 시작한 흔적이다.


자유공원
인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
인천역 3번출구에서 400m거리, 도보 6~7분 소요
높이 69M의 응봉산에 위치한 자유공원은 한국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라고 하는데,
이 곳에는 연오정(정자), 석정루(정자),충혼탑,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 맥아더 장군 동상, 배모양 전망대 등이 있다.
작은 동네 야산같이 높지 않지만 가벼운 산책과 또한 인천항과 인천바다를 내려다볼수 있는 장소이다.
밤에 올라오면 또다른 느낌의 야경을 볼수 있고, 봄에는 벚꽃도 볼수 있다.
아름다운 산책장소이고, 주변에서 유일하게 아픔이 없는 장소처럼 보인다.


제물포 구락부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송학동 1가) tel:032-765-0261
매일 오전 9:30~12:00,13:00~17:30 매주 월요일 휴관
자유공원으로 가는 중턱에 위치하고 1901년 완공된 근대문화교류의 현장이다.
무료이고 들어가면 비디오로 이 건물의 역사를 비디오를 통해서 설명 들을수 있다.
제물포구락부라는 명칭은 오늘 말로표현 하면 인천(=제물포)사교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이 구락부)이다.
인천에 들어온 청나라, 미국. 영국, 러시아,프랑스,독일 등 각국의 나라들이 친분을 쌓고 정보를 교환하는
사교와 친목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장소이지만, 자기나라 이익을 위해 혈안이 되는경우도 종종 있었고다.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이후 조계제도를 폐지하고 이곳도 1913년에는 다른 용도의 장소(일본 재향군인회관)으로 변경되었다.
이곳은 도깨비 촬영지이기도 하다.
반면 건너편에는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이 있다.(일요일에는 내부 휴무. 외부관람가능).


홍예문
인천 중구 송학동 3가 20
1908년 만들어진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으로서,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터널처럼 만든 석문이다.
일본 조계지 내의 일본인 인구가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그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새롭게 석문을 뚫게 되었다. 그리고 설계와 감독은 일본 공병대가 맡고, 중국인 건축기술자가 공사를 맡았으며 한국인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세웠다고 하며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다고 한다. 또한 공사를 진행할 때 예기치 못한 거대한 암석을 만나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다고 한다.
결국 일본인의 이익과 문자수송의 편리함을 위해, 그리고 조선의 수탈을 위해서 조선인을 동원해 이 홍예문을 뚫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에 인천의 중요문화자산인 산의 혈을 뚫었다고 하여 혈문이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최근 한류열풍으로 외국 관광객들로 소개되며 곳곳은 드라마촬영지,영화촬영지로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색적인 카페와 과거의 여행을 즐기고 활기차게 과거와 현재를 보며 공존하는 모습도
너무 보기 좋지만
역사적 이면에 숨겨져 있는 과거의 슬픈 역사적 사실들은 알아야 할 같다.
가슴아픈 또는 치욕적인 역사는 알고 되새기며,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때 이러한 어두웠던 과거는 잊지 말고
우리 아이들과 또는 주변사람들과 공유하며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거를 교훈삼아 미래에는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우고 잊지않도록 우리 기억해야 할 것 같다.


■ 작품설명 (개인의 경험을 가미한 설명을 부탁드려요0

아들에게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일본 침략기의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조사를 하던 중, 내가 모르는 인천의 역사를 많이 알게 되었다.
따라서 유행한 관광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확실히 알고 가자는 생각에 유명한 인천 관광지에 대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과거의 사실을 모두 인지하기를 바라면서 쓴다




5 2